도봉소개

도봉구의 발자취

도봉구의 발자취표이며 시대, 연대, 주요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대 - 삼한시대 마한 50개 소국중 고리국(高離國)때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
- 백제 온조왕 하북위례성
757 - 신라 경덕왕 때 현(現) 도봉구 지역을 포함 양주시 일대 내소군(來蘇郡) 설치
고려 - 태조 내소군을 견주(見州)로 개칭
- 현종 9년 견주를 양주에 편입
조선 1396 - 태조 한성부의 5부 방리명을 정하여 현 강북구 지역이 동부 숭인방에 속함
    - 영조“與地圖書”에 도봉구 지역인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 첫기록  
    ※ 조선시대 :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근대 1914 -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쌍문 방학 창 도봉동 지역은  양주군 노해면으로, 미아 번 수유 지역은 고양군 숭인면으로 편입.
1949 - 【대통령령 제159호】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
- (숭인출장소 설치 후 도봉지역 관할 - 쌍문, 방학, 창, 도봉동)
현대 1973. 7. 1 - 【대통령령 제6548호】성북구로부터 도봉구 분구 신설(21개동)
- [시조례 제784호]수유3동 신설(21개동→22개동)
1975. 10. 1 - 【대통령령 제7816호】구 관할 변경
- 도봉구 미아동 일부를 성북구에 편입
- 성북구 정릉동, 하월곡동 각 일부를 도봉구에 편입
- [시조례 제979호]동 명칭 및 구역 획정
- 정릉동 하월곡동 일부를 미아동에 편입
- [시조례 제981호]동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22개동→24개동)
1977. 9. 1 - [시조례 제1181호]미아8,번2,수유5,창2,도봉2동 증설(24개동→29개동)
1979. 10. 1 - [시조례 제1362호]동 명칭 및 구역 획정(창동 일부를 쌍문동에 편입)
1980. 7. 1 - [시조례 제1413호]동사무소 신설(29개동→35개동)
1985. 9. 1 - [시조례 제2015호]상계5동 신설(35개동→36개동)
1988. 1.1 - 【대통령령 제12367호】도봉구로부터 노원구 분구신설
- 도봉구 창동 도봉동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일부를 노원구에 편입
- [시조례 제2251호]동명칭 및 구역획정 변경(36개동→20개동)
1988. 7. 1 - <구조례 제59호>방학3동 신설(20개동→21개동)
1989. 1. 1 - 【대통령령 제12557호】자치구 관할구역 변경
- 노원구 창동, 도봉구 일원과 월계동 일부를 도봉구에 편입(26개동→27개동)
1989. 6. 1 - <구조례 제88호> 창4동 신설(26개동→27개동)
1991. 9. 1 - <구조례 제164호> 미아9동 번3동 쌍문4동 창5동 신설(27개동→33개동)
1994. 11. 1 - <구조례 제270호> 수유6동 방학4동 신설(31개동→33개동)
1994. 12.26 - 【대통령령 제14434호】자치구 관할구역 변경
- 도봉구 창동 일부를 노원구에 편입
- 도봉구 번동 일부를 성북구에 편입
1995. 3. 1 - 【법률 제4802호】도봉구로부터 강북구 분구 신설(33개동→15개동)
- 미아동 번동 일원과 수유동 우이동 쌍문동 일부를 신설구인 강북구에 편입
1995. 4. 20 - 【대통령령 제14629호】도봉구 쌍문동과 강북구 우이동 일부 간 상계 조정
2008. 2. 18 - 방학3, 4동 통합으로 14개동으로 구성
위의 표는 가로 스크롤 설정되어있습니다.

고려 및 조선시대

고려 태조는 이 내소군을 견주라 개칭하고 신라 때의 한양군을 양주라 고쳐 양주에 주지사를 두어 견주를 관할케 하였고, 현종 9년(1081년)에는 견주를 양주에 편입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양주고을 범위 내에서 도읍〔한성부〕을 정하고 현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기타 양주 지역은 그대로 양주로 속하게 하였고, 2년 후인 1396년에는 한성부의 5부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여 경계표석을 세웠는데 이 때 도봉구 일부 지역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다.

따라서, 도봉구의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한성부의 성외 지역이 되어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영조 때 각 도읍지(道邑誌)를 모아 편찬한『여지도서』를 보면 도봉구 지역인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및 현대

고종 32년(1895년)에는 한성부 소속의 양주군은 칙령에 의거 13도제에 따라 경기도의 3등군이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2년경 노원면과 해등촌면은 양주군에 계속 속해 있다가 2년 후인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노원면으로 통합하게 되는데 창동, 도봉, 방학, 쌍문리 등의 우리 구 전체 지명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해방 4년 후인 1949년 8월 13일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숭인면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과 동대문구 일부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로 편입하였고, 도봉구 지역은 숭인 출장소가 관할하게 된다. 1963년 1월 1일 양주군 노해면에 속해있던 지역이 성북구에 편입되고 성북구 노해출장소가 설치되어 도봉, 방학, 쌍문, 창동리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1973년 7월 1일에는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 관할지역을 합하여 22개 행정동을 관할하는 도봉구를 신설하였다. 이후 분동을 거듭하여 1979년에는 35개 행정동으로 규모가 증가되었고, 1988년 1월 1일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1일에는 도봉구에서 미아, 수유, 번동의 18개동이 강북구로 분리되었으며 쌍문, 방학, 창, 도봉동의 14개 동이 현재의 도봉구를 이루게 되었다.

선사 및 고대국가 시대

도봉구 지역 일대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로 추정되나 아직 선사시대의 유적이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넓은 의미에서 한강유역 서울의 일부라는 점에서 한강변 선사 문화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 하류의 서울 지역은 일찍이 삼국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며, 구체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시기는 백제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한강 중심의 통치구역에서 점차 남북으로 영토를 넓혀갈 무렵인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 ? ~ 286) 때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군사적 요충지이며 농업생산 활동을 위한 필수조건인 배산임수의 지형이 잘 발달한 우리 구 지역은 그 특성으로 인하여 각국의 선점노력이 경주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지역은 백제의 한성시대를 지나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한강유역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에 들어가고 고구려는 군현제에 따라 현재의 도봉구, 양주시 일대의 새로운 점령지에 매성군(일명 창화)을 설치하였다. 이후 백제를 거쳐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현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시 일대에 내소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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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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